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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류주 | 경향신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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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9-03-05 08:47 조회1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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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규 기자의 한국 술도가

제주 감귤로 빚은 브랜디 ‘신례명주’··· 그 술엔 50년 세월 묵은 ‘장인’의 다짐 녹아 있었다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리 141개 감귤 농가가 출자해 만든 농업회사법인 ‘시트러스’는 직접 재배한 밀감, 한라봉 등으로 다양한 술을 만들고 있다. 시트러스 제공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리 141개 감귤 농가가 출자해 만든 농업회사법인 ‘시트러스’는 직접 재배한 밀감, 한라봉 등으로 다양한 술을 만들고 있다. 시트러스 제공
2019.03.01 17:00 입력 2019.03.01 17:2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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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귤 넣어 만든 것치고 맛있는 걸 못 봤는데….” 팀장의 걱정스러운 배웅을 뒤로하고 제주로 향했다. 제주 감귤로 만든 브랜디(와인 등 과실주·과실즙을 증류해 만든 술) ‘신례명주’의 맛이 기막히다는 말을 여러 번 들은 터였다. 직접 마셔보고, 술을 만든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감귤 가공 식품 중 변변한 게 없다는 편견을 기분 좋게 깨주길 바랐다.

신례명주는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리에 위치한 농업회사법인 ‘시트러스’가 2016년 출시한 술이다. 옅은 노란색의 액체가 찰랑이는 술잔에서 은은한 과일향이 올라왔다. 구수한 오크향도 조금 느껴졌다. 단단하고 치밀한 감각이 곧 입안에 퍼졌다. 알코올 도수 50도답지 않게 목넘김이 부드러운 게 숙성이 잘된 위스키를 마시는 것 같았다. 입에 남는 잔향과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후향도 좋았다.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한 잔이었다. 술 자체의 완성도도 높은 데다 순수 국내 기술로 만든 브랜디라는 점에서 놀라움이 더 컸다.

알코올 도수 50도의 브랜디 신례명주. 시트러스 제공

알코올 도수 50도의 브랜디 신례명주. 시트러스 제공

신례명주는 가장 흔한 감귤 품종인 온주밀감으로 만든다. 연말마다 갓 수확한 귤의 껍질을 벗겨 알맹이만 착즙해 발효시킨 뒤 위에 뜬 맑은 술을 골라내 저온에서 증류한다. 증류하기 전 단계의 청주도 상품으로 내놨는데 이름이 ‘혼디주’다. 제주말로 혼디는 ‘함께’라는 뜻이다. 곡물로 만든 보통 청주와 맛은 크게 다르지 않다. 얼음을 띄우거나 차게 마시면 감귤의 상큼한 풍미가 배가돼 술을 잘 못하는 사람도 가볍게 한 잔 하기 좋다.

혼디주를 증류해 오크통에서 2년 이상 숙성을 거치면 신례명주가 된다. 오크통은 프랑스 리무쟁 오크와 미국산 오크를 섞어 쓴다. 숙성 용기에 따른 맛의 미묘한 차이를 실험하기 위해서다. 시트러스는 술을 빚을 때 누룩을 쓰지 않는다. 서귀포 감귤연구소에서 개발해 특허받은, 금귤에서 채취한 효모만으로 저온 장기 발효시킨다. 그래서 발효 과정에서 나는 특유의 군내가 없고 감귤의 새콤달콤한 향취가 술에 그대로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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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례명주는 증류 후 프랑스산 오크통과 미국산 오크통에 나눠 저장돼 2년 이상의 숙성 기간을 거친다. 김형규 기자

신례명주는 증류 후 프랑스산 오크통과 미국산 오크통에 나눠 저장돼 2년 이상의 숙성 기간을 거친다. 김형규 기자

시트러스는 제주에서도 이름난 귤 산지인 신례리 141개 감귤 농가가 모여 만든 회사다. 남는 귤을 가공해 부가가치를 높이려고 정부 지원을 받아 회사를 세우고 술을 만든 지 이제 4년이 됐다. 술 빚는 데는 너무 크거나 작아 상품성이 없는 것만 골라 쓴다. 농사만 짓던 농부들이 누가 봐도 그럴듯한 술을 이처럼 짧은 시간에 만들어낸 비결은 따로 있었다. 2015년 합류한 이용익 공장장(70)이 비밀의 주인공이다.

이 공장장은 1975년 진로에 입사해 JR, 길벗, VIP, 임페리얼 등 국산 위스키 제작을 진두지휘한 주류업계의 산 역사다. 최근 술 마니아들에게 선풍적 인기를 끄는 ‘일품진로’도 알고 보면 그의 작품이다. 희석식 소주가 시장을 강고히 지배하던 1980년대부터 그는 회사 내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증류식 소주를 만들었다. 경제 수준 향상과 함께 술 문화도 값싼 희석식 소주에서 고급 증류식 소주로 곧 넘어갈 걸로 봤지만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재고로 잔뜩 남은 증류식 소주는 스코틀랜드에서 위스키를 들여올 때 사용한 오크통에 보관됐고 IMF 외환위기로 회사 주인이 바뀌는 동안 10년 넘게 방치됐다. 그렇게 의도치 않게 장기 숙성된 소주가 술맛을 음미하고 즐기는 요즘 소비자들에게 큰 반응을 얻고 있으니 그의 선견지명이 뒤늦게 빛을 봤다고 해야 할까.

제주 방언으로 ‘함께’라는 뜻을 지닌 혼디주. 시트러스 제공

제주 방언으로 ‘함께’라는 뜻을 지닌 혼디주. 시트러스 제공

서울대 농화학과를 나온 이 공장장은 대학 시절 ‘개척농사단’이라는 서클 활동을 했다. ‘흙으로 돌아가는 대열’이 서클의 이념이었다. 실제로 농학과·임학과·축산학과 친구들은 졸업 후 농촌으로 많이 갔다. “내 전공은 당장 농사에 적용하기 힘들다 보니 술 만드는 쪽으로 빠져서 여태 살았지만 농촌을 위해 뭔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계속했어요.” 스무 살 청년 때 다짐을 그는 50년이 지나 제주에서 실천하고 있다.

신례명주는 시트러스 홈페이지와 도내 마트, 시장 등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다. 가격은 9만9000원(750㎖). 알코올 도수를 10도 낮춘 ‘신례명주 마일드’는 4만9000원(500㎖)이다. 한라봉으로 만든 화이트와인 ‘마셔블랑’(2만원·750㎖)과 그걸 증류한 25도짜리 증류주 ‘귀감’(2만5000원·350㎖)도 있다. 가장 매출이 높은 혼디주는 7000원(330㎖)으로 시트러스가 내놓은 술 중 가장 저렴하기도 하다.

한라봉으로 만든 화이트와인 ‘마셔블랑’(왼쪽)과 마셔블랑을 증류해 만든 25도짜리 증류주 ‘귀감’(오른쪽). 김형규 기자

한라봉으로 만든 화이트와인 ‘마셔블랑’(왼쪽)과 마셔블랑을 증류해 만든 25도짜리 증류주 ‘귀감’(오른쪽). 김형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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